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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에서글을쓰매

Where Were You

[로드제프]









 너는 어쩐지 아가씨 같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이마를 덮은 잘 손질한 보드라운 금발을 찰랑이고····젊은 너의 모습을 나는 왠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한 네가 내게 입을 맞춘다. 어떤 맛인지 알려줄게, 라며. 시인한다면 너는 달콤했어. 이미 처음이 아니었던 입맞춤은 지금 생각해보면 네가 다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어설프게 어린 나는 죄책감을 입술에 품은 듯 새벽마다 피가 나도록 그것을 깨물었다. 나의 혀끝은 언제나 눅눅한 철분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스튜어트. 그야, 그의 입맞춤은 언제나 달콤했을 것이다. 나의 신체에 새겨진 일기에는 당분이란 것이 없었고 형형색색의 사탕을 부숴놓은 길을 걷는 그는 물론 모세혈관들이 맞닿는 입맞춤 따위란 해보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창작이라는 열병이 나를 훑고 지나가는 여름에는 손목시계의 석영이 툭툭 내뱉은 탄성에도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위해 너는 벽장 쪽의 자리를 내게 내어준다. 외벽에 걸린 실외기가 울고 마른 무릎을 맞댄 침대 위의 우리는 어쩐지 형체 모를 용기가 받쳐 올라 너는 달콤한, 나는 쓰라린 속삭임을 남발하고 만다. 어깨 위의 손톱자국들만큼이나 의미 없는 고백들. 

 네가 듣던 노래와 내가 좋아하던 휘파람이 틀에 박힌 교차로에서 만날 즈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편집된 과거가 여전히 나의 가슴 언저리에서 상영되고 데드라인을 놓친 마흔다섯의 나는 반납하지 못한 수명을 왼쪽 어깨와 양손에 걸쳐 든 채

 서성댄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는 일 없이,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문장이 프렛 사이에 녹처럼 끼어있다. 금속이 품은 산소만큼 무거워지는 기타가 내 목 언저리를 누른다. 부식을 증명해주는 시간만큼 나의 초조 또한 늘어있음을 알아서.

 실버스크린 앞 가장 싸구려의 좌석에 네가 서 있다. 내가 싫어한 스카프를, 그는 더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를 눈치채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두려웠을, 나의 의미 없는 면역행위였을지도 모른다. 백혈구의 시체들이 켜켜이 쌓여 다시금 여름의 열병을 내게 부른다. 그러고 나면 내게 다시 환청처럼 들려오는, 무분별하게 몰아 쓴 너의 사랑한다는 목소리. 먼저 물거품이 되는 쪽은 어느 쪽일까, 너도 알고 있지. 문장을 빚는 데에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들이곤 했다. 인제는 목을 잃은 너와 다리를 잃은 나의 사이엔 무한할 사거리가 펼쳐져 있고 무량하지는 못한 시간만이 툭툭거리며 최후를 예고한다.


 무선으로 이어진 너와 나의 마음이 형편없이 전리층에 나뒹군다.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이미 원치 않는 항체를 두 손 가득 받아들었는걸. 위성과 전파가 허락한다면, 그것을 그의 앞에 모조리 쏟아내고 싶다. 그는 저주파가 깎인 반쪽짜리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다급하게 외쳐줄 것이다. 그냥 그랬음 좋겠다는 얘기야.

 그저 앞으로 이메일은 보내지 마.

 검은 앙금을 품은 유황 물이 푸른 새벽을 틈타 바다로 흘려보내진다.


 관공서에는 폐기처분을 기다리는 추잡한 기록들이 서류화되어 남아있고 과거의 내가 발명한 과오처럼 또다시 나의 모든 실수가 반복될 것을 알았지만 대출기한을 넘겨버린 사랑한다는 문장들 앞에

 들려온 것은 수신인의 부재뿐, 나는 전보를 다시금 쳐보았지만 

 세월은 세기를 한 자릿수 바꿔놓을 만큼 강력해져 버렸다.

 밤이면 무려 마일 밖의 커피 공장이 향수 섞인 수증기들을 뿜어냈고, 농축되고 고여버린 안개들이 여전히 붉은 밤하늘과 아파트들 사이에 머물러있으며, 맨션 블록 창문밖에 내걸린 실외기는 멈추어있다. 열증에 걸린 나는 궁금성의 사료를 퍼먹는다. 어린 짐승에게 그러듯이 맨손으로 나를 쓰다듬어주던 너는, 왜 그 모든 문장들은 수년의 수십의 세월을 부딪쳐야 내게 돌아오는지, 그제야 메아리치는지,

 왜 나의 목소리는 늘 과거를 두들겨야하는지,

 희석되어버린 원망을 나는 다시 응집시키고야 만다.


 이번에는 달콤한 네 피를 갈구해도 될 테지, 

 우리는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잖아.

 차마 닿지는 않는 바람들만이 우체통을 덜컹인다. 꿈을 지어주는 이는 내 요청들을 자주 들어주곤 했다, 표정없는 네가 나를 다시 안는, 벨벳 같은 꿈을 두르곤

 허무한 눈물을 머금고 나는 다시 깨어난다. 갈비뼈에 새긴 네 손자국이 아직도 불타는 듯한데.


 반송할 주소를 모르는 러브레터들은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내게 수정된 채 벽장 구석의 상자 속에 잠들어있다. 네게도 나의 것들이 있었음 좋았을 텐데, 그렇지, 로드. 수정액 대신 신경질스럽게 박박 그인 볼펜선 만이 나이테처럼 수십 해의 감정들을 간직하고 있다.

 로드, 어디로 갔어? 로디.

 빛바랜 종잇장 위로 몇 번이고 수정선이 그어진다. 이제는 촌스러워진 문장들,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었어, 미세하게 달라지는 시제들이 가로등 아래의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마른 셔츠를 걷어내며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사다리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털 없는 짐승 하나가 달 아래서 구슬피 울고 있다.

 하지만 앙금을 가득 품은 우리는 모두 추악하고······, 더러워질 것이다. 

썩어갈 것이다.


 어쩌면 그저 네가 아닌, 나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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